미국 노동통계국의 최신 데이터는 단순한 통계 수치가 아니라 하나의 신호다. 55세 이상 미국인의 노동시장 내 비중이 37.2%까지 떨어졌다는 것은, 수십 년간 상승하던 추세가 급격히 꺾였다는 뜻이다. 20년 만의 최저치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국의 중장년층과 고령층이 직장을 떠나고 있다. 주택과 주식자산 가치 상승이 조기 은퇴를 가능하게 했고, AI 도입으로 인한 업무 스트레스가 그것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이 현상을 한국은 어떻게 봐야 할까. ‘참고할 만한 사항’이라는 표현은 너무 순하다. 이것은 한국의 미래를 보는 것이다. 다만 미국이 지금 겪는 일을 한국이 겪으려면 5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다.
미국은 지금 ‘선택의 시대’…한국은 ‘강제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 노동경제학자들이 조기 은퇴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명확하다. 주택자산 가치 상승과 주식시장 수익으로 형성된 재정적 여유다. 쉽게 말해, 그만둘 수 있는 사람들이 그만두고 있다는 뜻이다. AARP 조사에 따르면 이미 은퇴한 미국인 중 절반이 ‘충분한 재정적 안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고 답했다. 25%는 업무 스트레스와 번아웃을 이유로 들었다. 즉,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 동시에 일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의 55세 중장년층이 직장을 떠날 수 있을까. 재정적 여유가 충분한가. 주택자산이 노후 자금으로 충분한가. 주식 수익이 생활을 보장하는가. 대부분의 답은 ‘아니다’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로 일해야 한다. 정년까지 버티거나, 정년을 넘어서도 일거나, 아니면 창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선택지가 없다. 미국의 신호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떠난다’는 의미라면, 한국의 현실은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의미다. 같은 나이이지만 처한 상황은 정반대다.
한국의 AI 도입 속도는 미국보다 빠를 것이다…충격도 더 클 것이다
미국에서 중요한 변수는 ‘AI 도입의 속도’다. 직장에서 ChatGPT를 사용한다고 답한 사람은 30~49세 사이에서 약 30%, 50세 이상에서는 약 15%다.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는 AI 기술 활용에 있어 자신감 하락 폭이 가장 크다고 맨파워그룹 조사가 보여준다. 이는 ‘충격이 이미 시작됐다’는 뜻이다. 미국의 중장년층은 지금 AI 도입으로 인한 업무 혼란과 자신감 상실을 겪고 있고, 그것이 조기 은퇴 선택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 기업들의 AI 도입 속도는 미국과 비교해 느린가, 빠른가. 통상 기술 도입에 있어 한국 기업들은 ‘빠른 추종자’로 알려져 있다. 미국이 실험하는 것을 보고 한국은 더 공격적으로 도입한다. 만약 한국의 AI 도입 속도가 미국보다 빠르다면, 중장년층이 경험하는 ‘업무 혼란’도 그만큼 빨리, 그리고 강렬하게 올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선택적 은퇴로 나타나는 현상이, 한국에서는 ‘강제 퇴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자산 여유가 없으니까다.
한국은 아직 ‘신호’를 읽지 못하고 있다…”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다
미국의 은퇴 심리 전문가 로버트 로라는 지적했다. “직장 생활의 핵심 요소들이 동시에 흔들릴 때 은퇴를 선택한다. 자율성이 도전받거나 바뀌고, 친구들이 직장을 떠나고, 회사의 방향에 동의하지 않을 때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한다. AI는 아주 큰 요인인데, 그것은 그들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흔든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환경 변화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한국은 이 신호를 읽고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번아웃’이나 ‘자율성의 상실’을 이유로 조기 은퇴를 선택한 사람의 통계가 있는가.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중장년층은 아직 ‘선택하는’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 ‘떠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단계라면, 한국은 ‘어떻게든 버티는가’를 고민하는 단계다. AI 도입으로 인한 업무 혼란은 한국에서도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떠날 이유’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자산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한국의 중장년층은 ‘번아웃을 겪으면서도 직장에 남아야 한다’는 이중의 고통에 처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고용주들은 이미 ‘조기 은퇴 환영’을 계산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신호가 있다. 고용주들의 행동이다. 버닝글래스연구소의 개드 레바논은 말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기 은퇴할수록 해고해야 할 사람은 그만큼 줄어든다.” 이는 고용주 입장에서는 ‘다행’이라는 뜻이다. 인원 감축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용주들은 이미 고령층의 자발적 퇴출을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강제 해고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한국의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할까. AI 도입으로 인한 인원 감축 압박을 받을 때, 미국처럼 ‘중장년층의 자발적 퇴출’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퇴출 압박을 받으면, ‘강제 해고’ 또는 ‘구조조정’의 형태로 당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발적으로 떠날 자산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 더욱 큰 갈등과 고통을 가져올 것이다.
5년 뒤 한국의 55세…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미국이 지금 겪는 일을 한국이 겪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보수적으로 추정하면 3~5년이다. AI 도입 속도, 기술의 성숙도, 기업들의 구조조정 계획을 고려하면 그 정도의 시차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즉, 2029~2031년 무렵 한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시점에 한국의 55세는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버티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대안을 갖추고 있을 것인가.
미국의 신호는 한국에 충분한 준비 시간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 준비는 개인의 차원에서만 할 수 없다.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고, 기업 문화의 전환이 필요하고, 사회 안전망의 확충이 필요하다. AI 도입으로 인한 직업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재교육 프로그램, 중장년층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는 제도, 조기 은퇴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 이 모든 것이 지금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미국이 겪는 ‘선택적 퇴출’이 한국에서 ‘강제적 퇴출’로 변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5년은 생각보다 짧다.
#노령사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