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요양원을 만드는 시대 — ‘치매머니’가 금융업의 경계를 바꾸고 있다

은행건물을 길 건너에서 바라본 장면

지금 은행들은 예금과 대출 너머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고령층이 보유한 자산이 얼마나 큰지보다, 그 자산이 어떻게 ‘잠기느냐’가 금융업 전체의 미래를 좌우하게 됐기 때문이다. 모 은행에서는 ‘치매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고령층 자산의 부상은 단순한 시장 기회가 아니라, 금융과 의료·돌봄의 경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로 보고 있다.

172조에서 351조로 — 치매머니는 왜 지금 주목받는가

치매머니란 치매 환자가 보유하고 있으나 스스로 관리하기 어려운 자산을 말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치매머니 규모는 172조원에 달하며, 2030년에는 220조원, 2040년에는 351조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수치가 주목받는 이유는 규모 자체보다 ‘관리 공백’에 있다. 치매가 진행되면 당사자는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자산은 가족이나 제3자에 의해 임의로 처분되거나 방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존에는 변호사나 법무사를 통한 후견제도가 유일한 대안이었지만, 비용과 복잡성 때문에 실제로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금융권이 이 공백에 주목하는 이유다.

독자 입장에서 보면, 치매머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치매 진단은 본인이 아닌 가족에게 더 먼저 현실이 된다. 자산 관리 권한을 누가 갖는지, 요양비를 어떻게 확보할지 — 이 문제를 사전에 설계해두지 않으면 가족 갈등과 자산 손실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금융+돌봄’ 통합 모델 — 전략인가, 필연인가

KB국민은행은 2020년 은행권 최초의 시니어 종합 상담센터인 ‘KB골든라이프센터’를 출범했다. 초기에는 연금 중심 자산관리에 집중됐지만, 지금은 상속·증여·요양·헬스케어까지 상담 범위를 넓혀 사실상 노후 전반을 관리하는 구조로 확장됐다. 지난해 7월에는 전국 18개 센터로 확대됐으며, 광주·대구·대전·부산에도 거점이 생겼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확장의 방향이다. KB금융은 치매안심신탁으로 자산을 관리하고, 이후 요양이 필요한 경우 그룹 내 케어 인프라와 연계하는 수직적 통합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금융과 돌봄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이는 단순히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생애 후반 전체를 하나의 플랫폼 안에 가두는 구조다.

이 모델이 성립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 그룹 내 요양 시설이나 헬스케어 인프라가 실제로 작동해야 하고, 금융 상담사가 요양·의료 수요를 연결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KB국민은행이 신설한 ‘골든라이프부’는 바로 이 전문성 체계를 조직 안에 내재화하겠다는 시도다.

5대 은행이 모두 뛰어든 이유 — 시니어 대전의 진짜 배경

KB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신한금융은 ‘플래티넘100’을 준비 중이며, 건강검진 연계부터 가사로봇 렌탈까지 금융·비금융을 통합한 생애주기 서비스를 설계하고 있다. 하나·우리·NH농협금융도 각기 시니어 브랜드를 선보이거나 출범을 예고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보유한 자산 규모는 4000조원을 넘어서며, 고령층은 이미 금융권 최대 자산 보유 집단이 됐다.

경쟁이 이렇게 빠르게 격화된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젊은 고객층은 인터넷은행과 핀테크로 이탈하고 있지만, 60대 이상은 여전히 오프라인 창구와 전문 상담을 선호한다. 시니어 고객은 이탈률이 낮고, 자산 규모가 크며, 상속과 증여 과정에서 자녀 세대까지 관계가 확장된다. 은행 입장에서는 한 명의 시니어 고객을 잡으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는 장기 고객을 확보하는 셈이다.

소비자가 확인해야 할 것 — 서비스인가, 상품 판매인가

이 흐름에서 소비자가 주의해야 할 지점이 있다. 은행의 시니어 서비스가 고객 보호를 위한 구조인지, 아니면 신탁·보험·펀드 판매를 위한 채널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치매안심신탁이나 증여플랜신탁은 자산 보호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수수료 구조와 운용 조건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요양 연계’라는 표현도 실제 요양 시설 이용 보장인지, 단순 정보 제공 수준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상담 내용이 금융 상품 가입으로 이어지는 구조라면, 노후 설계보다 상품 추천이 먼저인 구조일 수 있다. 가장 현명한 접근은 여러 기관의 서비스를 비교해보고, 금융과 비금융 서비스를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다.

치매머니 시대의 도래는 노후 자산 관리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은행이 돌봄 플랫폼으로 진화하려는 시도는 실질적 생애 서비스로 완성될 수도 있지만, 자산을 오래 묶어두기 위한 전략적 생태계로 작동할 수도 있다. 어떤 방향이든, 결국 준비한 사람이 유리한 시대임은 분명하다.